<미디어워치>일본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검증보고서 <3>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21-02-02 19:37:20    조회: 1,727회    댓글: 0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는 정신대 문제에 지난 46년간 엉터리 주장을 거듭, 발뺌하던 일본이 마침내 사실을 인정한 것은 최초로 정의가 승리한 역사적인 일이라고 지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해배상을 회피하는 것은 과거의 뼈아픈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는 뻔뻔한 자세라고 비판했다.

 

1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 칼럼 ‘횡설수설’은 영국의 더 타임스를 인용해 이렇게 썼다. 

정신대 만행은 이제 세계적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차마 옮기기가 주저될 정도의 끔찍스런 만행실태를 낱낱이 보도, 일제의 잔혹성을 인류의 양심에 고발하고 있다. 한 일본 군인은 정신대원이 지쳐서 성관계를 거부하자 폭력으로 정신대원의 하반신에 깨진 병을 집어 넣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이렇게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영향이 구미로 확산된 것이다. 

경향신문 1992년 1월 12일자 ‘일 ‘정신대’, 46년간 발뺌, 배상회피는 뻔뻔한 자세’ 기사
▲ 경향신문 1992년 1월 12일자 ‘일 ‘정신대’, 46년간 발뺌, 배상회피는 뻔뻔한 자세’ 기사


동아일보 1월 22일자 1면 칼럼 ‘횡설수설’
▲ 동아일보 1월 22일자 1면 칼럼 ‘횡설수설’


일과성이 아닌 영향(一過性ではない影響)

1991~1992년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의 근거가 된 사항은 아직도 살아 있다. 

2012년 8월 30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노다 총리, UN서 ‘위안부 없었다’고 연설해보라며 이렇게 썼다. 

1992년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교수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모집할 때 유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담긴 1938년 일본 육군성 작성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공개했다. 이를 뒷받침할 일본인의 증언도 속속 이어졌다. 1942년부터 3년 동안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일했던 요시다 세이지는 “육군성은 ‘성전을 위해 대의멸친하는 시책’이라고 이름 붙인 극비 통첩을 발부해 조선 여자들을 위안부로 동원했다”며 “1943년 5월 17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제주도에 도착해 ‘처녀 사냥’에 나섰다”고 증언했다. 그는 “위안부에 관한 일은 모두 군사기밀로 분류됐다”고 했다. (니시오카 쓰토무 번역)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는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요시다 증언이 허위라고 판단된 후에도 ‘근거’로서 거론되는 것은 중대하다.

조선일보  2012년 8월 30일자 사설 ‘노다 총리, UN서 ‘위안부 없었다’고 연설해보라’
▲ 조선일보 2012년 8월 30일자 사설 ‘노다 총리, UN서 ‘위안부 없었다’고 연설해보라’

이 지점에서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영훈(李栄薫)의 연구에 따르면 교과서가 처음 정신대를 언급한 것은 1952년이다. 이 시점에서 정신대와 위안대의 혼동은 없었으며, 1960년대 초반까지도 둘의 구분이 존재했다. 이영훈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집합적 기억은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8년에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겹치는 것 같은 기술이 나타나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그 후 1978년까지 정신대와 위안부에 대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1979년 교과서가 국정으로 될 때 “(일제는) 학도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해 우리 학도와 청년을 전선으로 데려갔고 심지어 젊은 여성들까지 산업시설과 전선으로 압송해 갔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 다음번 국정교과서는 1983~96년으로 “우리나라 여성들까지 침략전쟁의 희생으로 삼았다”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획기적인 것은 1997년이다. 이 해 “일제는 (중략) 강제징병제와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여기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 지역 전선에서 희생됐다. 이때 여성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연행되어 일본군 위안부로 비인간적인 생활을 시켰다”고 표현되어 있다(이영훈,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의 양상과 그 신화성’, ‘동아시아 역사 인식 논란의 메타 히스토리’에 수록). 

물론 이러한 한국 교과서 기술의 변화가 아사히신문의 영향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 교과서에 ‘위안부 강제연행’과 ‘정신대가 곧 위안부’라는 기술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 이후라는 점은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현재 사용 중인 것으로 보이는 교과서 ‘중학교 역사(하)’(두산동아, 초판 2012년, 2쇄 2013년)는 칼럼 ‘역사자료실’에서 “성노예. . . 생활을 강요당한 일본군 ‘위안부’”이라는 제목을 달고 위안부 여성에 대해서 싣고 있다(79페이지). 그 삽화에는 여성이 그린 ‘끌려간 날’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한복에 조선식 머리를 한 가냘픈 소녀가 팔을 붙잡혀 꽃밭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끌고 있는 사람은 팔밖에 보이지 않는다. 같은 일러스트는 ‘고등학교 한국사’(삼화출판사, 초판 2011년, 2014년 제4판, 276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강제연행, 성노예의 이미지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위안부 관련 삽화 ‘끌려간 날’
▲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위안부 관련 삽화 ‘끌려간 날’


2011년 8월 30일 한국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보상을 요구하는 외교협상을 하지 않는 것을 헌법 위반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이에 근거하여 한국 외교통상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이 위안부에게 보상을 하는 문제에 대한 외교 교섭을 계속 요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일본 측은 그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노다 총리에게 격렬히 해결을 요구하다가 다케시마(竹島) 상륙 강행이라는 압력 행사까지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며 일한수뇌회담을 거부하고 외국 정상에 대해서 일본 비판을 하고 있다. 일한관계 악화의 원인을 제공한 헌법재판소 결정에서는 첫머리의 사건 개요에서 “청구인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성적 학대를 받고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받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라고 썼다. 이 인식을 전제로 하여 의견 결정이 내려졌다. 아사히의 ‘92년 1월 프로파간다’가 만들어낸 강제연행, 성노예의 이미지가 의견 결정의 전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서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씨,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씨가 “일본군이 직접 집단적 폭력적 계획적으로 많은 여성을 납치하고 폭행하고 강제로 종군 위안부로 삼았다는. . . 이미지의 정착에 요시다 증언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아사히신문이 이런 이미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증거도 결정적이지 않다”(52쪽)라고 쓴 부분은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이 두 사람이이 “(그러나) 한국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과격한 언설을 아사히와 기타 일본 미디어가 이른바 엔도스(배서(裏書))해 왔다”(52쪽)고 말하는 점은 확실히 그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사히신문이 시동을 건, 혹은 조심스럽게 말해도 그것을 유발한 한국의 과격한 언설을 아사히 등이 재차 뒷받침한 것이다. 

1991년부터 92년까지의 소동의 영향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2012년까지 한국의 신문 기사와 사설에 요시다 증언이 반복하여 위안부 강제연행의 근거로 등장했으며 한국 신문은 여전히 그 기사와 사설을 취소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結論)

“일제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이해다. 일본시대를 알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표면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소수파다. 한쪽에서는 그 시대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만행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당연히 시대가 지날수록 일본시대를 모르는 사람은 늘어난다. 일본을 논할 때는 사실관계보다 이미지나 감정이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은 야만적이고 성적인 도덕이 낮은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또 역사적으로 여성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공물처럼 끌려갔던 경험이 강제연행의 스토리와 잘 맞아떨어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에서 ‘위안부 사냥’의 이야기가 던져졌을 경우에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난리가 날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요시다 세이지 등의 ‘증언’은 한국인에게 위안부에 대해서 일정한 이미지를 만들었고, 위안부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핵심 증언이 되어 간 것은 이미 본 대로이다. 

한편 일본 측에는 일본은 어디까지나 나빴을 뿐이고 선량한 조선반도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양심적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는 환영받고 있다. 양심적 일본인의 역사관과 한국 측 역사관은 친화성이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 각각의 역할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딱 맞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한국에 쉽게 침투하고 근본이 부정된 뒤에도 재생산을 계속하는 것이다. ‘양심적 일본인’ 입장에서 발신하는 매체로서 아사히신문의 존재는 컸던 것이 아닐까. 

90년대 초 일본 자신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뒤 정부, 국민 함께 자만하고 방심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의식이 없었던 것, 나라 전체가 지나치게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위안부 문제=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에 대한 서투른 대응을 초래했다. 

이러한 사정을 포함하여 생각한다고 해도, 제3자 보고서에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사히신문 보도의 영향의 존재 여부는 위안부 문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82페이지)고 생각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누누이 얘기했듯이 아사히신문 보도가 한국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므로 오히려 위안부 문제의 ‘출발점’이라는 게 적합하다. 


제3장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유엔에 미친 영향
(第3章「92 年 1 月強制連行プロパガンダ」の国連への影響)

- 카츠오카 칸지(勝岡寛次) (집필 담당) -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第三者委員会報告書に決定的に欠けているもの)

아사히신문사 제3자위원회는 “조사 대상 사항”의 하나로,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위안부 보도가 일한관계를 비롯한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을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보고서 1쪽), 유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 

총론에서도 말한 대로 원래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서는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개개의 위원들(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위원,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위원,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 위원, 하야시 카오리(林香里) 위원)이 각각의 견해를 개별적으로 말하는데 그쳐 위원회로서의 통일된 견해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가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검증하는 것은 아사히신문사가 이번 제3자위원회에 위탁한 가장 큰 위임 사항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제3자위원회 보고서가 개별 위원에 의한 제각각의 견해를 병기했을 뿐더러 적당히 얼버무린 것(영향 정도에 대한 위원들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라고 해야 한다.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가 준 국제 사회에의 영향의 유무를 생각할 경우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 되는 것이 유엔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1996년)임은 다수의 견해에서 일치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014년 9월 5일 기자회견에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일부가 아사히(朝日)신문이 취소한 기사의 내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보도가 유엔에 미친 영향의 유무에 대해서, 제3자위원회가 무시 내지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또한 보고서의 중대한 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일본어판 표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의 일역)
▲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일본어판 표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의 일역)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타노 스미오 위원과 하야시 카오리 위원이지만, 하타노 스미오 씨는 이 보고에 대한 아사히의 논조를 분석하여 아사히의 보도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국가 보상만이 유일한 길인 것처럼 논하고 있다”는 등을 서술하고 있다(보고서 66페이지). 그러나 아사히의 과거 위안부 보도가 이 보고서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의 검토는 전혀 하지 않았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된 ‘성노예’이라는 용어 및 일본군이 마치 ‘노예사냥’을 하듯이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강제연행’ 했다는 인식을 국제 사회가 널리 인지하게 된 단서가 된 것으로, 후의 미국 하원 결의(2007년)와 2010년 이후 미국 각지에 건립되고 있는 위안부 비문에도 직접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성노예’라는 말이 확산된 원인으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와 관계되고, 게다가 거기에 아사히의 요시다 증언 기사가 영향을 주었다”는 ‘논법’은 그가 행한 구미(서양) 신문에 대한 정량분석에 의해서는 “인정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두 개의 영향관계에 부정적이다.(보고서 별지 자료 2, 하야시 카오리(林香里), ‘데이터로 보는 ‘위안부’ 문제의 국제 보도 상황(データから見る『慰安婦』問題の国際報道状況)’, 31페이지). 하야시 카오리 씨의 말대로 “‘성노예’라는 단어는 9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의제로 설정된 세계적인 성폭력이나 인신매매 반대운동의 확산 속에서 서서히 침투했다”는 측면은 있지만, 아사히의 요시다 증언 기사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우리는 본다. 

따라서 본 독립검증위원회에서는 사태의 중요성에 비추어,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관계를 중심으로 독자적 검증을 시도하고자 한다.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아사히의 첫 보도와 ‘나의 전쟁 범죄’의 관계(慰安婦「強制連行」に関する朝日の初報と、『私の戦争犯罪』の関係)

위안부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사냥’에 관한 요시다 세이지 증언을 처음 세상에 소개한 것은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판의 82년 9월 2일자 기사였다. 

‘조선의 여성 나도 연행/전 동원 지도자가 증언/폭행 가해 억지로/37년만에 위기감에서 침묵 깼다(「朝鮮の女性 私も連行/元動員指導者が証言/暴行加え無理やり/37 年ぶり 危機感で沈黙破る)’라는 충격적인 제목을 붙인 이 기사는 오사카에서 전날(9월 1일)의 요시다의 강연 내용을 소개한 것이지만 위안부 ‘몰이’의 모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조선인 강제연행을 지휘한 동원 부장이 비참한 ‘종군 위안부 사냥’의 실태를 증언했다. (중략) / 이 날, 오사카·나니와 해방 회관에서의 집회에서 연단에 선 요시다 씨는 “체험한 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 “조선인 위안부를 황군 위문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내보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징용이라 하지 않고 ‘몰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1943년 초여름 제주도에서 200명의 젊은 조선여성을 ‘몰이’할 때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 조선남성의 저항에 대비하기 위해 완전무장의 일본인 10명이 동행했다. 마을을 찾아내자 먼저 군사가 포위한다. 이어서 요시다 씨의 부하 9명이 일제히 돌입한다. 젊은 여자의 손을 비틀어 골목으로 끌어낸다. 이렇게 해서 여성들은 잇달아 덮개가 있는 트럭에 처박혔다. 연행 도중 병사들이 덮개 안으로 뛰어들어 집단 폭행했다. 연일, 닥치는 대로 몰이가 계속되었다.

 

이 기사에 대해서, 전 아사히신문 외보부(外報部) 차장이었던 나가오카 노보루(長岡昇)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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