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워치>일본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검증보고서<2>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21-02-02 19:31:22    조회: 827회    댓글: 0

동아일보는 15일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처절하게 유린당한 정신대원들의 아픔과 슬픔을 막연하게만 헤아려왔다. 그러나 12세짜리 국교생(초등학생)까지 동원, 전쟁터의 성적 노리개로 짓밟았다는 보도에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분노를 억누르기 어렵다. (중략)

당시 이 학교에 근무하며 이들을 정신대로 보낸 일본인 담임교사 이케다(68, 여) 씨는 이들을  근로정신대로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케다의 말대로 일제는 이 철부지들과 그 부모들에게 황국신민으로 근로정신대에 가 보국해야 한다고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부리였다.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한 후 이들을 종군위안수로 빼돌린 사실이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케다가 죄책감으로 한국쪽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독신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이케다는 근로정신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략)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채 부모의 품을 떠나 정신대로 끌려간 소녀들이 부지기수였다. 울부짖는 여자들을 후려갈기고 젖먹이를 팔에서 잡아떼며 애엄마를 끌고간 경우도 있었다. 마치 노예사냥과 같았다. 

이렇게 동원된 종군위안부가 8만~20만명으로 추산된다.(1월 15일자 동아일보 사설 ‘12세짜리 정신대원’, 니시오카 쓰토무 번역)

 

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은 1991년 10월 10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요시다 세이지 씨의 증언 “위안부, 가해자 측에서 다시 증언, 젖먹이로부터 엄마를 떼어놓았다(‘여자들의 태평양전쟁’)”와 이미지가 겹친다. 

동아일보 1월 15일자 사설 ‘12세짜리 정신대원’
▲ 동아일보 1월 15일자 사설 ‘12세짜리 정신대원’


그런데 아사히신문은 위안부와 정신대의 오용에 대해서 “당시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고, 기자가 참고한 자료 등에도 위안부와 정신대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에 오용했습니다”(2014년 8월 5날짜 아사히신문)라고 설명했지만 의문이 남는다. 

‘초등학생이 위안부로’라는 오해가 한국에서 꿈틀거리던 그 때, 92년 1월 16일자 산케이신문에서는 구로다 가쓰히로(黒田勝弘) 서울 특파원의 ‘‘정신대’로 번진 파문, 위안부와 같다고 규정하고 한국 신문 보도(『挺身隊』で広がる波紋、慰安婦と同じ位置づけ、韓国紙報道)’가 게재됐다. 

특히 한국의 유력 언론은 이 초등생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하게 규정하고 캠페인처럼 연일 크게 전하고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중략) 일련의 언론보도로 한국 사람 대부분은 “전쟁 중 일본은 한국에서 초등생까지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또, 22일자 마이니치신문 석간에는, 시모카와 마사하루(下川正晴) 서울 특파원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기사의 글쓰기에서는 독자에게 근로정신대와 종군 위안부를 혼동시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 14일 지국에서 한국 신문 석간을 읽고 있었는데 알고 지내던 한국인으로부터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중략)

조선일보 독자 페이지에 장문의 편지가 실렸다. 여자정신대가 곧 종군 위안부는 아니었다며 “사죄와 보상을 얻으려면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식민지시대의 경험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아시아 NOW] 정신대와 위안부(「アジア NOW」挺身隊と慰安婦)’

 

그때부터 다른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신대가 곧 위안부라는 오해를 재촉하는 기사가 또 있다. ‘내 어머니가 그럴 리가’(1월 17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동네방네)라는 기사는 이케다 선생이 찾던 제자의 딸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다. 실제로 딸을 취재해 썼는지, 가상의 대화를 칼럼으로 썼는지,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대였다는 말에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여주인공 여옥이 떠올랐다고 한다. 

‘여명의 눈동자’는 1991년 10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MBC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로 1943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남녀 3명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여주인공 여옥은 위안부였다. ‘여명의 눈동자’는 “평균 시청률 44. 3%”의 인기 드라마로, “드라마를 통해 위안부의 존재가 공공연히 되어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됐다”고 한다(구로다 가쓰히로(黒田勝弘), ‘한국 반일 감정의 정체(韓国反日感情の正体)’, 52페이지)

공전의 히트작인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년)은 위안부와 정신대에 대한 혼선으로 인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위안부=정신대라는 인식을 고착시켰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윤여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로 끌려간다. 사진은 이 드라마의 영향력에 대한 언급하고 있는 최근 MBC 프로그램.
▲ 공전의 히트작인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년)은 위안부와 정신대에 대한 혼선으로 인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위안부=정신대라는 인식을 고착시켰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윤여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로 끌려간다. 사진은 이 드라마의 영향력에 대한 언급하고 있는 최근 MBC 프로그램.

이야기를 기사로 돌리면, “(어머니는) 일본인 여선생 이케다와 만난 것이 분노를 부른 것 같아 후회의 빛이 역력했다. 옛 선생님은 보고 싶었다, 걱정했다, 미안해요라며 짧은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깊은 한은 그 사과 한 마디로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이 제자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을 뿐인데, 마치 위안부가 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사실과 괴리되어 ‘12살 정신대원’은 확산되어 간다. 조선일보의 명물 칼럼 ‘이규태코너’는 “심지어 12살 초등학교 아이까지 데리고 가 성적 위안부로 삼고 수십만 명을 희생물로 바쳐”라고 쓰고 있다(17일자 ‘일본인의 인신 사채(私債)’). 

다음으로 12살의 정신대와 아사히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교사 출신인 여성이 한국에 와 학적부를 확인한 것은 앞서 말한 1월 14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1991년 7월로 나타났다. 

전 교사가 한국에서 제자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90년 9월 21일 오사카에서 전쟁반대 집회가 열려 나의 설득으로 근로정신대로 간 제자를 걱정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취재하러 온 도야마 TV가 찾아주었기” 때문이다(92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혹, 일본인 교사 이케다 씨 인터뷰’). 

한 전직 교사가 서울에 간 것과 같은 해 9월 16일 아사히신문 오사카판에는 ‘제자를 여자정신대로(편지 여자들의 태평양전쟁)(教え子を女子挺身隊に…(手紙 女たちの太平洋戦争))’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중에는 서울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운동에 모든 것을 걸고 계신 윤 선생(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 댁에 갔을 때 “정신대에 응모한 사람 중 조금 나이 든 사람은 종군 위안부에 보내진 거야”라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몰랐습니다. 종군위안부들의 고통을. 그리하여 제자들의 지난 46년간의 고뇌를.

 

윤정옥 씨는 위안부 문제에 나서온 정대협의 중심인물이다. “정신대에 응모한 사람 중 조금 나이 든 사람은 종군 위안부에 보내진 거야”라고 명쾌하게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근거를 짐작할 수 없다. 

92년 1월 16일자 아사히신문 오사카 판은 ‘비판 강해지는 한국 여론 ’초등학생까지 위안부로. . . ’(批判強める韓国世論『小学生まで慰安婦に…』)’라는 표제로 “한국 언론의 대일 비판이 더욱 심해졌다”, “국민의 대일감정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라고 썼다. “한국 언론에서는 정신대가 곧 종군위안부라고 파악하는 일이 두드러지면서 한국 국민의 대부분은 “‘일본이 초등학생까지 위안부로 삼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쓰고 있지만, 전년에 아사히신문이 이 사건을 게재하고 정신대가 곧 위안부로 쓰고, 오해를 확산시킨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프로파간다’의 효과(プロパガンダの効果)

‘12살 정신대’의 보도 타이밍은 일본에게는 최악이었다.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은 이제 이틀 후인 16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야자와 총리의 서울 체류 중 한국일보에 요시다 세이지 씨의 증언이 실렸다. 

위안부 모집은 노예사냥식으로 강요로 체포, 위안소는 일본 정부가 관리……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가두고 하루 수십 명씩 군인을 상대로 한 집단 강간. . . ,

노무보국회는 공단 및 공사 같은 국가 기관……전국 회장은 귀족원 의원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 . 

위안부는 처음부터 극비 사항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서는 없었다고 생각된다.(92년 1월 17일자 한국일보 (‘‘징용의 귀신’ 요시다 세이지 본지 증언 내용’)

 

라고 쐐기를 박듯 일본의 만행과 악랄함을 말했던 것이다. 

미야자와 방한 모습을 한국 신문들은 “미야자와 총리가 서울에 오기 며칠 전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정신대 논쟁이 언론을 뒤덮고 있다”(17일자 한겨레 사설),  “미야자와 총리가 오자 눈 내리는 거리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신문들은 모두 '국민학교 여자아동 정신대' 기사로 난리다”(18일자 경향신문 칼럼)고 표현했다. 

미야자와 총리 방한 중 2번째 정상 회담 75분 중 22분간이 위안부 문제로 소요되고, 그 사이에 총리는 8회 사과했다고 청와대가 무례하게도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대일 무역적자 시정과 기술이전을 요구했던 한국은 이들 문제에서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일본에서 보면 대일 무역적자는 한국의 경제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기술이전은 민간차원의 이야기였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예상이 빗나갔다고 할 수 있고, 사과해도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던 것은 손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월 18일자 중앙일보 사설은 ‘한일 정상, 무엇 때문에 만났는가’라고 썼을 정도다. 

원래 이 시기에는 냉전 종식, 전년의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북핵 문제, 일조(日朝) 교섭의 진전 등 대국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다. 

92년 1월의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일한(日韓)관계사에 남을 것이다. 가장 큰 상처는 사실오인에 근거한 위안부 문제로 양국 국민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성 문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모멸감, 증오는 한층 강해진다. 

나아가 전후 일한관계의 출발점인 1965년 조약을 뒤흔드는 사태가 나타난 점, 한국에 새로운 반일 카드를 주어 버린 점은 장래의 화근을 남겼다. 이 한 건으로 일한관계는 상당히 훼손된 것이다. 

확실히,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제적 확산의 조짐(国際的な広がりの兆し)

더욱 심각한 것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영향이 일한 간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확산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야자와 방한 이후 한국 신문들은 서구 언론의 인용을 늘렸다. 

동아일보는 1월 20일 ‘미국 언론, 정신대 만행 관심, WP 사설, 일 정부개입 인정, 책임져야’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8일 ‘위안부, 야만 행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서 “이것은 전쟁때 흔히 일어나는 단순한 잔학 행위가 아니라 일본제국군대 스스로가 고무, 지원한 전쟁의 추악한 얼굴”이라고 지적하고 “잔인한 죄과를 숨김없이 인정해야할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자와 일본 수상이 한국 국회에서 연설한 지난주까지 일본은 일본군의 여성 유린이 상인들의 개인적 죄악이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고 비난했다.

 

29일자 동아일보 ‘미 언론, 정신대 만행, 맹공격, 있을 수 없는 인권유린’은 16, 18일자 워싱턴포스트, 27일자 뉴욕타임스를 인용한 뒤 이렇게 썼다. 

정신대 문제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의 태도를 촉구해나가는데는 국제적인 여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신대 문제에 제삼국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문제를 두고 국제적인 공감대가 조성된다면 그것은 일본에 대한 압력이 될 수 있다. 한일 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단순한 갈등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이처럼 복합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시각에서 사태추이를 추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의 미국으로의 파급을 예언한 듯하다. 상기의 미국 신문 세 기사에 대해서는, 제1장에서도 언급되었다. 

동아일보 1992년 1월 20일자 ‘미국 언론, 정신대 만행 관심, WP 사설, 일 정부개입 인정, 책임져야’ 기사
▲ 동아일보 1992년 1월 20일자 ‘미국 언론, 정신대 만행 관심, WP 사설, 일 정부개입 인정, 책임져야’ 기사


동아일보 1992년 1월 29일자 ‘미 언론, 정신대 만행, 맹공격, 있을 수 없는 인권유린’ 기사
▲ 동아일보 1992년 1월 29일자 ‘미 언론, 정신대 만행, 맹공격, 있을 수 없는 인권유린’ 기사


또한 1월 22일자 중앙일보에서는 ‘정신대 배상 문제, 유엔 상정 추진, 대책협 기자회견’이라고 언급하며 유엔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보였다. 

독일의 신문을 인용해 1월 21일 경향신문은 ‘일 정신대, 46년간 발뺌, 배상회피는 뻔뻔한 자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