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열사 유해 환국사업가 강위종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20-07-27 09:09:24    조회: 1,022회    댓글: 0

순국열사 유해 환국사업가 강위종 

 

1909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서 강규빈()의 아들로 태어난 강위종()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낭화()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문학부 지리역사과에서 수업하던 중 1945년 광복 이후 ‘재일조선문화단체연합회’ 산하 언론기관인 조선신보사 사장으로서 일본에서 동포의 권익옹호와 조국 재건사업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46년 5월부터 일본에 방치되었던 순국열사들의 유해를 조국에 봉환()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순국열사유골봉안회를 홍현기()·박근세()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열사들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공원()에 봉송 안장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동포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사업에 착수하여 1950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봉안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1955년 일본 후생성()에서 한국인 전몰자 명단을 찾아 내었는데, 1971년 3월 5일 『경향신문』 보도를 통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재일태평양전쟁 한국인 전몰자 봉안회 회장인 강위종씨가 일본 후생성 관리들과 오랜 교섭 끝에 2천3백 31위의 전몰자 명단을 알아냈으나 일본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조총련계의 방해공작 등으로 지금까지 유골이 송환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는 재일교포 실업가로서 사재() 5천만원을 기부하고, 국내 저명인사들과 함께 봉환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봉환사업의 어려움 속에서도 911주() 유골의 유족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봉환하고 유족을 찾지 못한 700주의 유골은 동경 유천사()에 봉안한 후 한국정부에 인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1975년 6월 19일 외무부와 보건사회부의 추천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강위종은 한국인민문화단체연합회의 회장으로서 재일교포의 권익옹호와 함께 문화 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이를 각성시키고자 1982년 10월 25일에 도쿄 축지()의 본원사()에서 ‘일제하 한국인 전몰자 위령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3년 12월 10일에는 서울에서 열린 ‘한일 불교 대표자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인 전몰자 유해 봉환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88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5년 6월 19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위종 [姜渭鍾]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강위종姜渭鍾:1909(융희3)~?(분단시대), 순국열사 유해 환국사업가. 안덕면 창천리<창고-내> 강규빈姜奎彬의 아들이다.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낭화浪華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명치明治대학 문학부에서 수학, 1945년 해방 후 재일조선문화단체연합회의 산하 언론기관인 조선신보사 사장으로서 일본에서 동포의 권익 옹호 및 조국 재건 활동을 하였다.1946년 5월 순국열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 이를 위해 홍현기洪賢基, 박근세朴根世 등과 함께 순국殉國열사유골봉안회奉安會를 조직,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禎基 등 3열사의 유해를 봉송하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케 하였다.앞서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각처에서 전사한 동포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도 서둘렀다.1950년 이강훈李康勳, 홍현기洪賢基, 이유천李裕天, 박근세朴根世, 김정주金正柱 등과 함께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봉안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1955년 일본 후생성에서 한국인 전몰자 명단을 발견하고, 그 유골들을 찾아 그 유족에게 이를 알려 911주柱의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하였다.유족을 찾지 못한 700주는 동경 유천사裕天寺에 봉안하였다가 한국정부에 인계하였다.1975년 6월 19일 외무부와 보건사회부의 추천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다.또 일본에서 한국인문화단체연합회 회장으로서 교포의 권익옹호와 문화 사업에 노력하였다.1982년 10월 25일 토쿄 축지築地의 본원사本院寺에서 엄수된 일제하 한국인전몰자 위령제를 거행, 이는 일본이 교과서 왜곡歪曲사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반성하지 않자 일본으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한 것이다.1983년 12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韓日 불교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는데 한국인 전몰자 유해 봉환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기 위한 조치였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연합뉴스

<외교문서 발췌> 재일한인 유골봉환(1973)

입력 2006.02.05. 18:03 수정 2006.02.05. 18:0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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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한국인 전몰자 제주도 유족회가 1972년 1월12일 외무부.보건사회부 장관에게 보낸 문건.

- 제목 제주도 출신 유골인수에 관한 건.

상기 건에 관해 재일 태평양전쟁한국인 전몰자 유골봉환회 회장 강위종씨에게 서기 1972년 3월24일 관계 서류 및 위임장을 발송하여 모든 봉환문제를 위임하고 일본 정부 당국에 제출했다.

 

▲외교부 기안용지 73.5.15

- 동북아 1과 조원일 기안. 수신자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

제목: 재일한국인 유골의 조속봉환을 위한 관할 조정 요청

2차대전 중 군인.군속으로 징병 또는 징용되어 전몰한 우리 국민의 유골 2천83주를 현재까지 일본정부가 보관중이나 우리측 인수태세 미비로 여태 이를 인수치 못하고 있는 바 이를 조속 인수할 수 있는 국내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주관부서를 조정할 것을 요청.

1.지금까지 경위

가. 2차 대전 중 전몰한 한국인(22,000명 추정) 유골의 일부인 2,331주(북한지역 출신 유골 469주 포함)가 일본 후생성에 보관돼 있어 인수 및 봉환교섭을 해 옴.

우리는 유골 일괄인수를 주장한데 대해 일측은 북한 및 조총련의 금후 예상되는 문제제기를 이유로 난색 표명.

나. 69년 제3차 한일각료회의시 북한지역 출신인 유골도 연고자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은 가족의 요청에 따라 개별 인도토록 양국간 양해 성립.

다. 이후 민간 베이스로 유가족이 개별적으로 2주, 71.11.20 재단법인 `부산영원'이 246주를 인수함으로써 잔여분은 2,083주가 됨.

상기 유골봉환시 정부가 매 주당 1만원의 장례보조비를 지급하고 일 정부에서 매 주당 1만원의 조위금을 제공.

라. 동 유골봉환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당 부에서는 72.10.27 보사부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 동 유골의 봉환에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리면서 보사부가 조속히 인수태세 갖출 것 요청했으나 보사부는 예산 미계상 및 부처간 협의 결여 등을 내세우는 동시에 유골인수에 따른 사후처리 문제를 주관하는데 의문을 갖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

2.일본측 태도

일본 정부는 한국측 지정지점까지 봉환책임을 지고 유족에게 1만원 정도의 조위금을 제공할 것이 확실하며, 69년 제3차 한일각료회의시 양해에 따라 북한지역 출신인 유골(469주)도 연고자가 한국에 있는 것은 봉환.

3.문제점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한국이 독립된 지 28년된 지금까지 강제징집된 국민 유골을 인수치 못하고 있음은 국가적 수치.

4. 결론

일본과의 외교교섭상에는 별 문제가 없고 국내 인수준비만 갖춰지면 하시라도 인수할 수 있는 상황에 있음에 비춰 재일 전몰 한국인의 유골을 봉환하는데는 무엇보다 국내 관계부처에서 예산확보 등 인수준비 태세를 갖추고 사후처리 주관부서를 명확히 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므로 동 문제를 처리.주관할 부서를 명확히 하도록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함.

▲면담요록 1973.11.23 15:00∼15:50

마에하타 마사토시, 오채기 서기관, 조원일 사무관 동북아 1과서 면담.

마에하타: 본인은 태평양 전쟁때 미쓰비시 중공업의 히로시마 공장서 근무. 이 공장에 약 2천명의 한인이 징용으로 와 있었고 종전과 더불어 대부분 귀국.

45.9.15 이 공장서 일하던 한국인 246명이 히로시마 역을 떠났으며 이들은 센자키에 가서 선편으로 한국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후 한국에 도착하지 않고 완전히 종적이 없어졌으며 자신은 지난 20년간 이들의 종적을 찾으려 노력한 결과 246명은 센지끼에서 승선 못하고 도바따에서 조그만 배를 빌려 9.16 출항하다 9.17∼18 구주해안에 불어닥친 태풍에 의해 난파돼 침몰한 것이 확실.

그 후 난파한 배의 선체와 익사체가 대마보 및 이끼도로 표류해 왔다는 이야기 듣고 대마도와 이끼도 답사결과 많은 한국인 익사체가 표류해 와서 주민들이 매장한 사실 확인. 대마도 가세우라에 20구 매장사실 확인.이끼군 아시베쪼 나카야마후러에 약 500구의 한국인 시체가 매장돼 있으며 여기에는 위령비도 서 있음. 이 시체들은 당시 일본 본토의 다른 지방에서 출항한 한국인들일 것임.

자기는 인도적 견지에서 개인으로 이같은 추적 행했는 바 자기 힘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이며 이들 유골의 한국으로의 봉안에 대해 한일 양국정부의 조치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 11.22 우시로꾸 대사도 만나 일본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일본 대사관의 모리따 참사관에게 자기가 아는 구체적 사실을 서면으로 전달했다.

▲보건사회부 공문 73.12.24 제목 재일본국 전몰 한국인의 유골봉환에 대한 회의 개최 발언내용 요약.

경제기획원: 유족 보상금은 대일본 청구권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안다. 앞으로 청구권 관리법 제정되면 XX될 것으로 보나 그 시기는 모르겠다. 그러므로 유골봉환시에는 보상금 보다 조의금으로 그 한계를 정해야 할 것이다.

내무부: 유골봉환에 따른 문제점으로서 정부측 무성의와 유족보상문제 미해결 등에 대한 유족항의를 어떤 방법으로 무마할 것인 지가 문제의 초점 될 것.

외무부: 유족보상문제는 일본정부와 이미 모든 외교적 문제가 종결되었으므로 정부에서 적절한 방법 강구해야 할 것.

경제기획원: 일본국을 위해 희생된 전사자 유골인데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정부가 직접 납골당과 위령탑을 건립하여 유골을 안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외무부 기안용지 73.12.28 기안책임자 동북아1과 조원일 수신자 보사부장관

제목: 유골봉환을 위한 외교교섭 1. 73.12.11자.

국무총리 각하의 전몰 한국인 유골봉환 방침 수립지시중 당부 소관사항 다음과 같이 통보. 2. 종래 인수장침 재검토 및 대일교섭을 위한 구체적 방안

가. 인수범위

1) 남한출신자 유골전부와 북출신자 유골중 유족이 남한에 있는 것 부터 우선 인수 2) 잔여 북한출신자 유골은 상기 유골봉환후 다시 일본 정부와 교섭토록 함.

나. 봉환책임 1) 아국정부가 지정하는 장소까지 일본정부가 책임하에 봉환토록 함 2) 봉환시 일본정부에서 정중한 예의를 표하도록 교섭함.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가 봉환토록 함.

다.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교섭 일본측에서는 종전 개별인도시 유족에게 향전대 조로 매 주당 1만원을 지급한 예가 있음.

라. 대일교섭시기 1) 일본정부와의 교섭은 이미 일단락된 것이고 앞으로 교섭할 사항은 별 문제없는 것 뿐이므로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임에 반해 유족확인 등 제반 국내 인수준비를 갖추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임. 2) 따라서 일본 정부에 대한 관계를 고려해 구체적 교섭은 국내 인수준비가 마무리되는 단계에 개시함이 가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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