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잠자는 강제동원 증거물, 무엇을 위해 11년을 모았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21-07-11 00:54:48    조회: 2,803회    댓글: 0

잠자는 강제동원 증거물, 무엇을 위해 11년을 모았나

군인·군무원 공탁금 명부. 명부에는 국적, 창씨명, 주소, 미지급 금액 등이 기재돼 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군인·군무원 공탁금 명부. 명부에는 국적, 창씨명, 주소, 미지급 금액 등이 기재돼 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증거’ 확보는 분쟁해결의 출발점이다. 특히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필수가 된다. 국가 간 분쟁도 이와 유사하다. 대부분의 피해국은 국력을 동원해 증거 확보에 나선다. 심지어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입은 피해 증거를 수집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 기록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관동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피해국인 한국은 어떨까. 한국 입장에서 문제는 피해를 입증할 기록 대부분이 당시 일본제국에 의해 생산됐고, 현재 소장처 역시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증거를 내놓겠느냐”는 자조적 인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과거 한국 정부는 증거 확보에 주저함이 없었다. 1950년대, 정부는 일본과 배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피해자 명부를 작성했다. 이를 위해 ‘일본기업 이름’이 한줄이라도 적힌 문서라면 적극 수집했다. 이렇게 확보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를 압박해 더욱 상세한 자료를 받아냈다. 이러한 시도는 적어도 ‘강제동원위원회’(이하 위원회)가 활동했던 2015년까지 이어졌다. 

잠자는 강제동원 증거물, 무엇을 위해 11년을 모았나

위원회는 11년간 활동하며 총 5377건의 대일항쟁기 피해자료를 확보했다. 자료 1건은 1장 또는 1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원회가 해체된 후 2016년 6월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자료가 44만4885개에 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위원회 해체 후 자료수집 성과와 비교해보면 해당 수치는 더욱 도드라진다. 현재 위원회 업무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가 담당한다. 2016년 신설됐다. 

경향신문은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실을 통해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가 2016~2021년 강제동원 기록물수집에 배정한 예산과 집행 현황을 확인했다. 해당 기간 기록물 수집을 위한 별도의 예산은 책정되지 않았다. 2016년, 2018년 각각 2700만원, 100만원을 들여 703명의 한인 기록, 6명의 한인 기록을 입수했다. 기록물 수집 담당 인력은 0.3명이다. 전담인력 없이 1명이 다른 업무와 함께 담당했다는 의미다. 사실상 기록물 등의 증거자료 입수는 중단된 상황이다. 

잠자는 강제동원 증거물, 무엇을 위해 11년을 모았나

더 이상 찾을 것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확보한 증가자료는 잘 활용하고 있을까. 기록물은 그대로 두면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관계를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배상뿐만 아니라 역사기록이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후세대가 역사를 배우고 경계하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위원회가 확보한 대표적 기록물의 관리현황을 추적했다. 위원회 활동목적이 진상규명과 위로금 지원이었던만큼 당시 수집한 자료는 피해의 직접 증거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위원회가 11년 동안 자료를 모은 이유’를 확인한다는 의미도 있다. 

■확보한 기록물의 가치 

주간경향이 찾아 나선 기록은 약 21만건의 피해신고 내역, 공탁금 명부, 후생연금보험 명부 등이다. 모두 강제동원 피해자가 전범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근거가 된 자료들이다. 

공탁금 명부, 후생연금보험 명부를 확보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국 측이 처음 자료의 존재를 알고 이관을 요구하자 일본 정부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며 회피했다. 이에 위원회 측은 한국의 진상규명 의지를 보여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위원회는 흩어진 자료들을 한군데 모아 이미 상당 부분 전산화를 진행한 상태였다. 당시 협상 팀장이었던 오일환 중앙대 교수는 일본 대표단 앞에서 이 시스템을 시연했다. 

“피해자 이름 중 한글자만 입력해도 관련 자료가 검색되고 사진, 피해진술 기록 등을 교차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고 일본 측에서 탄성이 나왔다.” 시연회에 참석했던 당시 조사과장 정혜경 박사의 말이다. 끝까지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선언에 일본은 2010년 공탁금 명부 일부를, 2011년에는 후생연금보험 명부 일부를 보내왔다. 

노무자 공탁금 명부. 명부에는 국적, 창씨명, 주소, 미지급 금액 등이 기재돼 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노무자 공탁금 명부. 명부에는 국적, 창씨명, 주소, 미지급 금액 등이 기재돼 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두 기록이 가치 있는 것은 피해자의 이름, 피해내역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공탁은 채권자(강제동원 피해자)가 채무금을 수령할 수 없는 경우나 채무자(일본 기업)가 채권자를 확정할 수 없는 경우 법원에 채무금을 예치·위탁하는 법적 행위다. 전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서도 미지급 임금, 수당, 부조금 등을 공탁하도록 했다. 이 공탁 관련 기록을 모아둔 것이 공탁금 명부다. 명부에는 국적, 창씨명, 주소, 미지급 금액 등이 기재돼 있다. 피해자의 신상과 배상금액을 확정하는 데 필수일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기업의 조선인 동원 규모와 처우까지 살필 수 있다. 

후생연금보험 명부. 일본과 사할린 등에서 노무자를 동원한 기업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후생연금보험 명부. 일본과 사할린 등에서 노무자를 동원한 기업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 정혜경 박사 제공

후생연금보험은 일본의 공적연금제도다. 일본과 사할린 등에서 노무자를 동원한 기업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보험료율은 임금의 11%였고, 급여에서 원천징수했다. 사망·사고나 퇴직 시 탈퇴수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피해자가 보험가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성명·생년월일·소속 작업장 주소와 이름 등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가입 사실이 확인되면 명부 발급과 탈퇴수당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광복 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신청서 항목을 모두 기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은 동원 당시부터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결국 피해사실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명부를 확보해 피해자 기억과 대조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위원회는 총 1만147명의 기록이 담긴 명부 일부를 인수했다. 

■흩어진 기록물은 ‘비공개’ 

이렇게 수집한 자료들은 2015년 위원회 해체 후 각각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국가기록원,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등 3개 기관으로 흩어졌다. 각각의 기관에 보관 여부 확인을 요청했다. 담당자를 찾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보관 명칭이 다른 경우 어떤 자료인지를 설명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자료를 이관받은 것은 국가기록원이다. 21만건의 강제동원 피해 기록과 공탁금 명부를 보관 중이다. 2016년 이관됐다. 자료는 모두 비공개다. 피해 당사자나 유족이 찾아와 요청하는 경우에만 확인이 가능하다. 이마저도 위원회가 구축한 전산화된 형태는 아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해당 자료는 보존 및 확인 서비스만 한다”며 “국가기록원은 별도로 확보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만 현재 DB화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작업도 2020년에야 시작됐다. 이중 공탁금 명부 기록은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고령의 피해자나 유족이 이를 먼저 알고 조회 요청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보관만 하는 자료는 단순한 종이와 다를 것이 없다. 

후생연금보험 명부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확인됐다. 명부에 대한 확인요청에 관계자는 “해당 명칭으로는 자료의 소유 여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후생연금보험에 대한 설명 이후 관계자는 문서고에서 이 자료를 찾았다. 그는 “마이크로필름을 출력한 것을 복사해 총 43권의 책으로 제본해 보관하고 있다”며 “위원회가 확보한 자료 전부를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반 공개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절차가 정립되지 않았다”며 “학술 연구로도 이 자료가 대출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자료확보와 연구를 지속했더라면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조사관들에게 확보한 기록물은 ‘자식’과 같다. 일본과 줄다리기 협상 끝에 받아낸 ‘천금’ 같은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기록물 소식을 정 박사에게 전했다. “처음에는 분노했는데 이제는 그냥 체념입니다. 훼손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소장 기관이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따지기는 어렵다.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다는 답변으로 모든 문제가 덮인다. 그럼에도 책임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 교수는 “일본은 기록을 한국 정부에게 주는 대신 개인이 일본 정부에 자료를 달라는 요구는 받지 않겠다는 전제를 꼭 달았다”며 “이에 동의하고 자료를 받은 정부가 문서를 비공개로 가지고만 있다면 이 사실조차 모르는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역사문제로 촉발된 갈등은 한일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입장은 1965년 한일협정을 근거로 한국 측이 해결방안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자료입수와 공개가 끊긴 상황이 아쉬운 점은 이 때문이다. 현재 피해자들은 한일협정이 아닌 개인청구권 문제라는 별개의 영역에서 싸우고 있다. 만약 연인원 780만명의 강제동원 기록이 더 확보됐더라면 지금처럼 몇몇 피해자의 개인 소송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원회에서 조사·심사과장을 지낸 허광무 박사는 “만약 자료입수와 연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일본이 지금처럼 큰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더 많은 사례를 확보하고, 더 많은 연구 성과가 공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일본이 우리가 왜 한국 정부도 무관심한 일에 나서느냐는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자 했던 사실은 이제 질문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왜 11년 동안 자료를 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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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07100958001#csidxa6697edd6233f078c535b48ca496918 onebyone.gif?action_id=a6697edd6233f078c535b48ca496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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